롬 7:22 ~25 본문 분석 이후에 자세한 글이 있습니다.
속 사람을(에소 안트로포스, ἔσω ἄνθρωπος)
따라(카타, κατά)
하나님의(투 데우, τοῦ Θεοῦ)
율법x 법o 을(노몬, νόμον)
기뻐한다(쉬네도마이, συνήδομαι)
➡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한다.
그러나(데, δὲ)
내 지체들 안에(엔 토이스 멜레신 무, ἐν τοῖς μέλεσίν μου)
다른 법이(에테론 노몬, ἕτερον νόμον)
내 마음x 지직-사고o의(투 누오스 무, τοῦ νοός μου)
법과(토 노모, τῷ νόμῳ)
싸워(안티스트라튜오메논, ἀντιστρατευόμενον)
내 지체들 안에 있는(엔 토이스 멜레신 무, ἐν τοῖς μέλεσίν μου)
죄의 법에게(토 노모 테스 하마르티아스, τῷ νόμῳ τῆς ἁμαρτίας)
나를(메, με)
포로로 끌고 가는 것을(아이크말로티존타, αἰχμαλωτίζοντα)
본다(블레포, βλέπω)
➡ 그러나 내 지체들 안에 다른 법이, 내 마음x 지직-사고o의 율법과 싸워, 죄의 법에게 나를 포로로 끌고 가는 것을 본다.
비참한(탈라이포로스, ταλαίπωρος)
나, 사람이로다(에고 안트로포스, ἐγὼ ἄνθρωπος)!
누가(티스, τίς)
이(투투, τούτου)
죽음의(투 타나투, τοῦ θανάτου)
몸으로부터(에크 투 소마토스, ἐκ τοῦ σώματος)
나를(메, με)
건져내랴?(뤼세타이, ῥύσεται)
➡ 비참한 나, 사람이로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께(토 데오, τῷ Θεῷ)
감사하노라(카리스, χάρις)
우리 주(예수 크리스투 투 퀴리우 헤몬,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예슈아 메시아를 통하여
그런즉 나 자신이(아우토스 에고, αὐτὸς ἐγώ)
마음x 지적-사고o 로는(토 누이, τῷ νοΐ)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노모 투 데우 둘류오, νόμῳ Θεοῦ δουλεύω)
육체로는(테 사르키, τῇ σαρκὶ)
죄의 법을 섬긴다(노모 하마르티아스 둘류오, νόμῳ ἁμαρτίας δουλεύω)
➡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예슈아 메시아 우리 주를 통하여. 그런즉 나 자신이 마음x 지적-사고o 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체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코이네 헬라어 누스(νοῦς)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인간 내면의 사고 체계—곧 인식, 분별, 양심, 그리고 도덕적 판단의 중심이 되는 영역을 설명합니다. 그는 이 누스가 하나님의 율법(토라)과 조화를 이루어 온전히 작동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며 그것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누스가 마비된 상태에서는 혼(네페쉬)이 육체(사르크스)와 결합되어 본능의 지배를 받게 되며, 그 결과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진리는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실제적인 예로, 다윗의 장남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에게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무엘하 13장). 암논은 다말의 외모에 끌려 병이 날 정도로 욕망에 사로잡혔고, 마침내 그녀를 꾀어 강제로 범하고는 곧바로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성적 욕망이 어떻게 혼과 육체를 사로잡고, 누스가 기능을 멈출 때 얼마나 잔혹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남성의 성기는 뼈가 없는 연조직 구조로 되어 있으며, 혈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강한 혈류가 흐를 때 팽창하며 긴장 상태에 도달합니다. 이 생리적 구조는 본능적 욕망이 촉발될 때 매우 강력한 충동으로 작용하게 되며, 이 순간 누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혼은 육체의 지배 아래 놓여 죄의 도구가 됩니다. 암논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고, 욕망을 분별하지 못했으며, 끝내 자신의 누이를 짓밟는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누스의 마비’가 가져오는 영적 붕괴의 상징입니다.
다말은 이 사건으로 평생을 수치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처녀성을 잃은 여인은 결혼의 길이 막히는 것뿐 아니라, 명예 자체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녀는 찢어진 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덮어쓰고 울부짖었으며, 형 압살롬의 집에서 버려진 인생처럼 살아가야 했습니다. 압살롬은 이 사건을 마음에 담고 있었고, 끝내 암논을 죽임으로써 복수했지만, 그 분노는 가문 전체의 비극을 낳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무기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는 나를 사로잡는 다른 법이 있다”고 탄식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로마서 8장에서 새로운 소망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인간 안에 거하면, 다시금 누스는 살아나고, 혼은 육체의 욕망이 아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참된 자유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명과 평안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며,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끄는 길. 육체의 충동 앞에서도 죄를 이기게 하고, 타락의 고리를 끊어내며, 온전한 사고 체계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기쁨으로 따르게 만드는 새 창조의 능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서 7장까지 이끌어 온 모든 설명은 단지 추상적 개념이나 신학적 체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 내면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예언적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의 목적은 인간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철저히 무력했던 자신의 과거를 통하여, 무엇이 참된 회복이며, 무엇이 참된 ‘영의 부활’인지 보여주고자 합니다.
바로 여기서 핵심은 누스입니다. 누스가 살아난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 곧 토라를 억누르는 부담이나 형벌의 도구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토라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생명의 원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그 율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은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뻐하여 순종하는 삶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이 거듭난 자’, 곧 ‘영이 부활한 자’의 내적 증거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혼이 아직 육체의 본능 아래 묶여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누스가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고 있는지를 스스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이 살아난 자는 토라를 기뻐하고, 그 가르침을 억누르는 법이 아닌 자유의 길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참된 회심자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열매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단지 선언이나 이론이 아니라, 누스가 성령에 의해 살아나고, 혼이 육체가 아닌 영을 따르게 되는 실제적 변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좇는가, 아니면 기뻐하며 따르는가—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 각자의 영이 부활했는지 아닌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