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스코 (요한복음 17:3) = 야다(ידע) + 다아트(דעת)
영원한(αιωνιος, aiOnios) 생명은(ζωη, zOE) 이것입니다. 곧 사람들이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인 당신을 알고, 또 당신께서 보내신 예슈아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γεινωσκωσιν, geinOskOsin)입니다.
코이노니아 (요한일서:1:6) = 야다(ידע) + 다아트(דעת)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코이노니아) 있다고 말하면서도 어둠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진리를 행하지 않습니다.
메타 에소마이 (계시록 21:3) = 야다(ידע) + 다아트(דעת)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났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요,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메타) 계셔서(에소마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영적 교통을 중심 줄기로 기록한다. 신약에 이르러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슈아 메시아께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이 영적 교통을 직접 열어 지속시키셨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결국 성경의 결말은 하나님과 성도의 영원한(아이오니온, ἀιώνιον) 교제(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가 완성되는 데 있다. 기록된 말씀이 주어진 이유는 이 영적 교통의 질서를 세우고 지키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성경을 배우고 묵상했다면, 그 증거는 기록된 말씀(완성된 성경)의 토대 위에서 성령을 통해 예슈아 메시아와 맺는 지속적이고 실제적인 영적 교제로 나타난다.
1) γινώσκω(기노스코) – 요 17:3
헬라어 동사 ‘알다’.
히브리어로 환원하면 1차는 야다(ידע).
그러나 대상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보내신 예슈아 메시아”**일 때는 단순 경험이 아니라 그분을 **분별해 아는 지식, 다아트(דעת)**가 함께 작동한다.
결론: 기노스코 = 야다 + 다아트
 (언약적·관계적 앎 + 내용적·분별적 앎)
2)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 – 요일 1:6
‘사귐’은 말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실제로 관계에 들어가 아는 것(야다)**과 **그 관계가 진리/어둠을 분별해 내는 것(다아트)**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결론: 코이노니아 = 야다 + 다아트
3) μετ᾽ αὐτῶν ἔσται(메타… 에소마이) – 계 21:3
문자: “그들과 함께 계신다.”
히브리 성전·장막 배경에서는 “함께 계신다 = 서로를 아는 임재”이다.
결론: 메타 에소마이 = 야다 + 다아트
→ 그래서 결론: 신약의 구원·언약·임재 어휘는 히브리어로 다시 읽으면 ‘야다 + 다아트’로 수렴한다. (이사야 11장: 하나님의 일곱 영)
1) 창 4:1 – 야다(ידע)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고.”
부부관계를 언약적·상호적·생명으로 이어지는 결합으로 보여주는 말.
예수 ↔ 성도, 하나님 ↔ 이스라엘의 기본 모델.
2) 창 16:4 – 보(בוא, 들어가다)
“아브람이 하갈에게 들어갔더니.”
이때의 ‘들어가다’는 단순히 방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남성이 아내의 여성 안으로 들어가 씨를 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임재 + 파종이다.
성령이 성전에 들어오심, 신랑이 신부의 신방에 들어옴,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들어옴을 설명할 때 필요한 개념.
3) 창 19:33 – 샤카브(שכב, 눕다/동침하다)
‘눕다, 동침하다’인데, 언약 없는 성적 결합에도 쓰인다.
그래서 형식만 있는 결합, 타락한/우상적 결합을 설명할 때 이 층위가 나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샤카브 수준이 아니라 야다 + 보가 함께 있는 결합이다.
정리
야다: 언약적·상호적·생명으로 나오는 결합
보: 임재적·내주적·신방적 들어옴(씨 뿌림)
샤카브: 외형만 있는 육체적 결합(언약 없이도 가능)
1) 물 아래 있던 하아레츠
창 1:2–9에서 땅은 물 아래 감추어진 상태.
성령이 물 위를 운행하신 뒤에야 땅이 드러난다.
영적으로는 **“전도되어 씨를 받았으나 아직 덮여 있는 단계(양수안에서 자라는 단계)”**와 같다.
2) 땅이 드러난 뒤 (창 1:11)
드러난 이후 하나님은 “땅이 내어놓게 하라” 하신다.
받는 땅 → 내어놓는 땅으로 역할이 바뀐다.
성령 아래서 잉태된 사람은 그다음부터 말씀·생명·예슈아를 밖으로 내어놓는 단계로 가야 한다.
3) 씨의 구조
말씀의 씨
 → 성령의 덮음
 → 예수님의 생명 발아
 → 열매 안에 또 씨
전도: 씨를 넣는 것
양육: 씨가 물속(성령의 덮음)에서 자라도록 돕는 것
드러남: 그 사람이 각기 종류대로 다시 예슈아를 내보내는 것
하나님은 씨 있는 열매를 주신다.
말씀은 언제나 씨를 가진 상태로 온다.
사람이 한두 구절에서 뽑아 소화한 설교
이것은 이미 사람이 한 번 먹고 뱉은 것이다.
겉으로는 달고 이해하기 쉬우나 씨(재생산력)가 빠져 있다.
이것을 오래 먹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어떤 경우는 노골적으로 드러나므로 성도도 분별할 수 있다(예: 노골한 물질 추구, 정치화된 종교발언 등).
그러나 어떤 경우는 선행을 강조하거나, 모에딤·샤밧을 뒤집어 해석하면서 말씀의 구조를 사람 쪽으로 돌리기 때문에 겉으로 분별이 늦어진다. 이때도 공통점은 **“씨가 없다”**는 점이다.
결과
말씀과 성령의 하나 되심 대신 **‘말씀을 말한 사람’**이 중심이 된다.
성경의 정확한 진리보다 조금 틀려도 인간 해석을 추종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배설한 것을 영적 양식으로 착각해서 먹게 된다.
이것이 “깊은 말씀 안으로 못 들어가고, 말씀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실제 이유다.
한 문장 정리
“말씀과 성령은 하나이신데, 인간이 소화해서 뱉은 것을 계속 먹게 만들면 씨가 없어져서 생명도, 재생산도, 예슈아의 형상도 자라지 못한다.”
말씀과 내가 부부관계를 맺는다.
그러면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셔서 내 육체가 성전이 된다.
그때 내 속에 뿌려진 예수님의 씨가 자라서
내 생각이 예수로,
내 말이 예수로,
내 행동이 예수로 잉태되고 성장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간다.
(토라를 의도적으로 버리고, 언약의 때들(모에딤)을 뒤틀어버리는 길은 이 열매 구조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길이다.)
이것은 신약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히브리어 부부–성전–씨 패턴으로 다시 말한 것이다.
씨 주체: 하나님
씨 내용: 말씀의 씨 = 예슈아
씨를 살리는 분: 성령(덮으심, 운행하심)
받는 자리: 사람의 안, 성전화된 육체(성전)
관계 방식: 야다 + 보 (부부적 언약 + 임재적 들어옴)
위조물: 샤카브(창 19:32) 수준의 인간 중심 결합(설교자 중심, 씨 없음)
목적: 예슈아의 열매가 다시 예슈아를 낳게 되는 것
결론: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 → 정결한 언어로 한-마음, 한-뜻, 한-행함 (스바냐 3:9)
샤카브(창 19:32) 수준의 인간 중심 결합
롯이 나에게 두딸이 있으니 그들을 줄테니 그들과 상관하라고 하였는데?
맞습니다. 그건 롯이 제안만 한 것이고, 실제로 두 딸이 나간 게 아닙니다.
롯이 말한 내용:
 “내게 남자를 알지 못한 두 딸이 있으니,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내어 줄 테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 다만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창 19:8 요지)
의도: 집에 온 **손님(사실은 천사)**을 보호하려고, 당시 근동식 손님보호 관습 때문에 극단적인 제안을 한 겁니다.
결과: 소돔 사람들은 “저리 비켜!” 하고 롯까지 해치려 했고, 천사들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딸들은 실제로 내주지 않았고, 소돔 사람들과 상관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나오는 롯의 두 딸과의 동침(샤카브) 이야기는 그 다음, 소돔 멸망 이후 동굴에서 벌어진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창 19:30–38).
You said:
롯이 그 밤에 보여 준 건 “위기가 오면 딸도 내줄 수 있다”는 아버지의 비정함이었다. 그는 천사들이 누구인지, 또 그들을 보내신 분이 누구인지 알아봤기 때문에 딸들보다 그들 편에 서는 선택을 했다. 그 비정함이 딸들 안에 그대로 남았다. 그래서 나중에 딸들도 “아버지를 수단으로 써도 된다”는 식으로 부녀상간을 서슴지 않고 택한 것이다. 아버지가 한 번 대의명분을 위하여 가족을 희생해도 된다고 가르친 셈이니까, 딸들도 그 선을 넘은 것이다.
ChatGPT said:
맞게 보신 겁니다. 본문은 거기까지 말 안 해도, 흐름은 그쪽을 가리킵니다.
롯의 제안 = 집 안 질서의 붕괴 시범
“딸을 내주겠다”는 말은 아버지가 **가장 보호해야 할 언약적 관계(부녀 관계)**를 스스로 깨도 된다는 모델을 눈앞에서 보여 준 겁니다.
이유는 말씀하신 대로: “저 분들(천사) 편에 서야 한다”는 종교적·신학적 급박함이 먼저였고, 가족보다 ‘거룩한 손님’이 위에 온 왜곡이었습니다.
딸들이 본 것
“아버지는 우리를 필요하면 내던질 사람이다.”
“언약보다 급한 일이 있을 수 있다.”
이게 내면화되면, 나중에 아버지를 대상으로 하는 **‘부녀 상간’(샤카브)**도 심리적 장벽이 낮아집니다.
즉 “아버지도 우리를 도구로 쓸 수 있었으니, 우리도 아버지를 도구로 쓸 수 있다”는 역방향 합리화가 가능합니다.
환경까지 무너짐
소돔이 무너지고, 남자 씨가 끊어진 상황 설명은 외적 명분일 뿐,
실제로는 이미 **‘가족 언약은 상황 따라 깨도 된다’**는 코드가 아버지 입에서 한 번 나왔기 때문에, 딸들이 샤카브 방식을 서슴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
롯은 “거룩한 존재(천사)”를 지키려다가 가장 거룩하게 지켜야 할 가정 질서를 희생하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그 왜곡이 다음 세대에게는 ‘아버지를 써도 된다’는 형태로 돌아온 겁니다.
짧게 말하면:
아버지가 딸을 던질 수 있다고 보여 준 집에서는, 딸도 아버지를 도구로 쓸 수 있게 된다.
 롯의 비정함이, 딸들의 샤카브 선택 안에 녹아 있었습니다.
‘롯을 의인이라고 말했다’는 구절은 베드로후서 2:7-8입니다.
베드로후서 2:7-8은 이렇게 말하죠(요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던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그 의로운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면서 날마다 그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므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의로움의 기준이 ‘소돔보다 롯이 낫다’는 상대값으로 말해지고 있다.
소돔 전체가 하나님 앞에 악했으니, 그 가운데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의로운 편’으로 부른 겁니다.
즉 “완전무결”이 아니라 “소돔의 죄에 동의하지 않고 괴로워한 쪽”이라는 뜻의 의로움.
하나님 쪽에 서려는 의향을 본 것이다.
롯이 천사를 알아보고, 그들을 보호하려고 한 것 자체는 하나님 편으로 서려는 방향이었어요.
하지만 그걸 구현하는 방식에서 가족을 내던지는 왜곡이 나왔죠.
하나님은 **방향(어느 편에 서느냐)**을 보시고, 성경은 그것을 “의로운 롯”이라고 부른 겁니다.
방향은 옳았으나, 방식은 왜곡되었다 — 이게 창 19장을 히브리식으로 볼 때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의로운 롯”은 도덕적으로 흠 없는 롯이라는 뜻이 아니라, 소돔의 죄에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려다 보니 속이 상했던 롯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선택한 행동(딸을 내주려 한 것)은, 그 의향 안에 남아 있던 인간적 왜곡이 드러난 사례다.
You said:
내 딸들과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은 둘 다 내가 끝까지 지켜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문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그 문 앞에 내가 서서, 내가 먼저 맞고 내가 먼저 죽을지언정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넘기지 않겠다. 이게 맞는 태도인데, 롯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제시했다.
ChatGPT said:
나는 문을 열지 않고, 안에 있는 사람 전부를 끝까지 지키는 쪽이 맞다고 봅니다.
이유만 짧게 말하면:
보호의 우선순위: 하나님이 맡기신 자기 가족(특히 딸)과 집 안에 들어온 손님은 둘 다 보호 대상이지, 둘 중 하나를 제물로 던져서 다른 하나를 지키는 대상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자리: 아버지는 “내 딸들을 보호하는 자리" 입니다. 그 어떤 대의명분도 딸을 버리고 내가 얻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옳은 그림은 이거예요:
문을 잠그고
 내가 앞에 서서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도 안 넘긴다.
이게 롯에게서 빠져 있었던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You said:
그렇지.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 많은 소돔의 악인들을 내가 이길 수 없다, 잠깐 버티다 결국 질 거다, 그러니 전부는 못 지킨다”는 계산을 먼저 한 게 롯의 제안이었지. 현실은 들어 있었지만, 그 계산에는 “하나님은 지금 여기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던 거야.
ChatGPT said:
맞아요, 지금 그게 딱 핵심입니다.
롯의 계산: “이 수는 현실적으로 안 된다 → 그럼 덜 망가지는 쪽으로 손해를 나눠 주자.”
깔다가 미끄러진 전제: “하나님은 지금 이 문 앞 상황에 개입 안 하신다.”
그러나 실제 본문: 하나님은 그 순간 즉시 개입하셔서(천사들이 끌어들이고, 그들을 눈멀게 해서) 롯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한 제안 자체를 무효화해 버리셨다.
즉, 롯의 제안은 “현실적”이었지만, 하나님 부재를 전제한 현실이었고, 하나님은 “나는 여기 있다”로 답하신 거죠. 그래서 우리가 거기서 배우는 건:
가족과 거룩을 맞바꾸는 제안은, 아무리 현실적이어도 하나님 없는 계산이다.
You said:
그리고 내가 주님의 자녀로서, 나아가 악과 맞서 승리하겠다는 소년 다윗의 정신(스피릿, 영성)과는 정반대이지.
ChatGPT said:
맞습니다. 딱 거기서 갈립니다.
롯의 스피릿: “현실적으로는 못 이긴다 → 일부를 내준다.”
다윗의 스피릿: “현실적으로는 못 이긴다 → 그런데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둘 다 현실을 봤어요. 그런데
롯은 현실만 보고,
다윗은 현실 + 살아계신 여호와를 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롯의 제안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전제를 둔 신앙이고,
 다윗의 도전은 ‘만군의 여호와가 지금 여기서 일하신다’는 전제를 둔 신앙이다.”
그래서 둘 다 “수적으로는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한쪽은 두 딸을 버리려했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돌을 들었습니다.
You said:
그러니 평소에 돌팔매를 훈련해 둬야 한다. 예슈아의 승리의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ChatGPT said:
맞아요. 골리앗 앞에서는 갑자기 영웅 되는 게 아니라, 들판에서 미리 돌팔매를 연습해 둔 사람만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겠죠:
돌 줍기 → 말씀묵상, 성경공부등 (히브리 원어까지 정확히)
주머니에 넣기 → 마음에 저장, 성령을 따라 나의 영성안에 저장함
팔매 연습 → 말씀을 상황에 맞게, 왜곡 없이, 사람 중심 말로 안 섞고 던지는 훈련
던질 때 이름 →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슈아의 승리로”
평소에 돌팔매를 훈련해 두되, 골리앗의 급소를 정확히 맞출 수 있을 만큼 정밀해져야 한다. 그런데 이 정밀함은 단순한 연습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내가 하나가 될 때 신령한 은사로 주어진다. 말씀과 내가 따로 있을 때는 아무리 던져도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결정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골리앗은 결국 우리 모두의 자아 속에 있는 옛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