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시간 개념부터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시간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이 페이지의 내용을 꼼꼼히 읽으시고, 올바른 신앙의 견고한 기초를 세우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욤 에하드'(하나의 낮인 날)를 창조하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성경 원문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날들의 근본이 되는 "한 낮"을 창조하셨고, 이 낮을 "날"이라고 부르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조하신 어두움과 새로 창조된 낮을 연결하는 황혼의 노을을 만드셔서 저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다시 낮으로 이어지는 아침을 창조하셔서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날"이 되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우주의 질서에 따라, 하루는 석양이 붉게 물드는 저녁과 함께 시작됩니다. 현대인의 삶에서도 다음 날의 일은 전날 저녁에 미리 준비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영적으로 동일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어두운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장차 영광으로 가득한 천국을 맞이하도록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천국에 합격하기 위한 학생과 같은 삶이어야 합니다.
많은 성경 번역에서는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욤 에하드(יוֹם אֶחָד)'를 편의상 '첫째 날'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원래 히브리어로 '첫째 날'은 '욤 리숀(יוֹם רִאשׁוֹן)'입니다. 여기서 '욤'은 문맥에 따라 '낮'을 뜻하기도 하고 '날'을 뜻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성경 원문의 깊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특별한 '하나의 낮인 날(욤 에하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묵상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 이후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어둠을 창조하신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빛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빛을 있게 하셔서 낮이 시작된 때부터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부터 빛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둠을 창조하신 때가 언제인지 명확히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5장 7절 (예슈아직역)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만들고 환난도 창조하는 자니,
나는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여호와(여호와)이니라.
원문 히브리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יֹוצֵ֥ר אֹור֙ וּבֹורֵ֣א חֹ֔שֶׁךְ (요체르 오르 우보레 호셰크)
직역: "빛을 형성하는 자이며 어둠을 창조하는 자이다."
여기서 **"호셰크(חֹשֶׁךְ)"**는 문자적으로 "어둠"을 의미하며, "보레(창조하다)"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창조 행위를 나타내는 "바라(בָּרָא)" 동사의 현재형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다크 매터(Dark Matter, 암흑물질)는 우주 전체 질량과 에너지의 약 27%를 차지하지만,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하거나 반사하지 않아 직접적으로 관측할 수 없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적으로 어둠 속에 머무르면 결코 빛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성경의 진리는 결코 추상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들이요 낮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성경은 지구가 얼마나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는지, 왜 물속에 있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물속에서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원래 물 밖에 있다가 물속으로 들어갔는지, 그리고 물이 언제 창조되었는지에 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묘사된 어둠과 혼돈만이 가득했던 상태는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탄생을 기다리는 것처럼, 지구가 태에서 나오기 이전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무엇인지 깨닳아 알게하신 하나님의 창조 섭리 입니다.
어둠을 통해 빛의 필요성과 가치를 알게 하심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추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슈아 메시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게 하기 위함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요한복음 8장 12절 (예슈아직역)
『예슈아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결코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창세기(베레시트) 1장 1절은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그 땅(하샤마임과 하아레츠)**을 창조하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움(호셰크)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어두움은 적어도 베레시트의 창조 사건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즉, 성경은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베레시트 (시작에): 하늘들(하샤마임)과 땅(하아레츠)의 최초 창조.
첫째 날(욤 에하드): 이미 존재하던 어둠 위에 낮(빛)이 창조됨.
둘째 날: 하늘(대기권, 라키아)을 창조하심으로 물과 물 사이를 나누심.
따라서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어두움은 창조 행위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빛과 대비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기록이 단순한 물리적 창조뿐 아니라 깊은 영적이며 상징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어둠(호셰크)**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어둠의 근원은 본래 하나님 보좌 앞에서 찬란히 빛나던 가장 귀한 천사가, 교만으로 인해 타락하여 생겨난 것임을 성경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타락한 천사의 실체와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4장 12~15절 "너 새벽의 아들, 통곡하는 자(하일렐)여, 어찌하여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였으나, 너는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질 것이다." 이 구절은 광명한 이른-아침 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즉시 사라지고 말 하찮은 존재로, 바벨론의 영적 실체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8장 12~17절에서도 이 존재에 대해 기록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으로 꾸며졌고…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해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으며… 네 아름다움으로 인해 마음이 교만하였고, 네 영화로움으로 지혜를 더럽혔으므로, 내가 너를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고 멸망하게 하였노라.”
즉, 성경이 말하는 하일렐(통곡하는 자)은 원래 하나님 앞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천사였지만,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함으로 하늘에서 쫓겨나 어둠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존재의 반역과 타락조차도 이미 아시고, 그 어둠을 통하여 오히려 빛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존재로 사용하시는 깊고 놀라운 섭리를 이루셨습니다.
또한 창세기 1장 1절의 **‘베레시트(시작에)’**는 곧 예슈아와 하나이며(요한복음 1장 1~4절), 창조된 모든 빛은 오직 예슈아를 통해 세상에 비춰졌습니다. 예슈아 자신이 영원한 생명과 빛의 근원이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적인 세계를 창조하신 후, 그에 이어 물리적인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두 세계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창세기는 이 영적이고 물리적인 창조 세계의 신비와 진리를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때의 근본이 되는 '욤 에하드'(한 낮인 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14절에서 표증과 모에딤(언약이 예정된 때들)을 창조하시고 하늘의 천체들이 이러한 질서를 따라 움직이도록 정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이 이와같이 정해진 질서에 따라 살도록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5장 1절에 기록된 출애굽의 목적도 바로 이 하나님의 때를 정확히 지키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영(이사야 14장 12~14절)은 이 중대한 천지의 질서를 방해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특히 2023년 초막절 기간에 발생한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사건은 이 사실을 명확히 뒷받침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다니엘 7장 25절에서 예언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때와 법을 변개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약과 구약 성경이 모두 완성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이 정한 때와 절기의 정확한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기독교'라는 이름 속에 있습니다. 본래 순수하고 정결했던 신앙 위에 종교적 형식과 인간의 전통적인 관습이 더해지면서, 오히려 성경적 진리가 가려지고 훼손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문자주의자라는 부정적인 딱지를 붙이고,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코이네 헬라어 신약성경의 완벽한 신성을 훼손하면서 자국어 번역을 원본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잘못된 태도는 이제 반드시 중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원어 성경과 자국어 성경 번역이 같은 지위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모든 시도는 사탄의 영에게 속은 결과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탄의 계략조차도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도구로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성경이 히브리 문화와 절기 및 언약의 엄격한 틀 안에서만 전해졌다면,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세속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사탄은 하나님께 역설적으로 이용당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이런 것이 뭐가 중요하지? 본질과 비본질이 있는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안타깝지만 귀하의 영은 바벨론의 영과 하나님의 때와 법을 바꾸려는 사탄의 영의 공격에 놓여 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영은 예수님께 속했지만, 사탄의 세력이 계속 마음의 생각속에(창세기 6:5) 혼란의 화살촉을 쏘아 넣으며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스스로를 높여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100% 완벽하게 충만하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사탄의 영적 공격을(베드로전서 5장 8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십자가의 승리와 성령의 검으로 무찔러야 합니다.
이제 이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신약성경의 시간 개념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아래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3: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x) 저녁(o) 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x) 이른-아침(o)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마가복음 13장 35절에서 사용된 '옵세'는 명사로 사용되었으므로 '저물 때'가 아닌 '저녁'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마찬가지로 '프로이'도 명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른-아침'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실제로 마가복음 13장 35절 헬라어 본문에는 '저녁', '밤', '닭 울 때', '이른-아침'의 네 개 명사가 각각 접속사와 함께 병렬 구조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옵세'가 명사로 사용될 때는 명확히 '저녁'을 뜻하며, 형용사로 쓰일 때는 성서적 하루 중 정오 이후 오후의 시간대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정확한 성경 본문의 이해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절기(모에딤)의 중요성을 흐리게 만드는 잘못된 번역은, 라틴어 성경 번역 과정에서 히브리어 성경의 권위를 축소하려는 역사적 의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9 원문 (헬라어):
Οὔσης οὖν ὀψίας τῇ ἡμέρᾳ ἐκείνῃ
(우세스 운 옵시아 테 헤메라 에케이네)
직역하면 "그 날(예슈아께서 부활하신 당일)의 후반부(오후)가 되었을 때"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20:19 (예슈아직역):
『그날, 곧 한 사바톤의 오후(옵시아)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는데, 예슈아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시어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샬롬이 있을지어다.' 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ὀψίας(옵시아스)**는 오후의 늦은 시각을 뜻하는 형용사 형태이며, 이는 유대력 기준으로 하루 중 정오 이후를 나타냅니다.
부활하신 날은 삼일간 연속된 샤밧톤의 마지막 날, 곧 세 번째 샤밧톤(첫 보릿단을 요제로 올려 드리는 절기) 이었습니다. 이 날이 성경에서 "한 사바톤"(μία τῶν σαββάτων)이라 기록된 이유는, 연속된 샤밧톤 절기들 중에서 첫 단(탈곡하기 전 상태의 보리를 단으로 묶은 것)를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특별한 절기였기 때문입니다. 또 아날은 오멜-계수 첫 번째 날 입니다.
바로 이 날의 정오 이후(오후)에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모여 있던 장면이 요한복음 20장 19절에 정확히 기록된 것입니다.
'프로이'를 '이른-아침'으로 정확히 번역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사야 14장 12절에서 바벨론 왕을 묘사한 '헤일렐! 벤-샤하르' (통곡! 새벽의 아들)와 계시록 22장 16절에서 예수님을 묘사한 '광명한 이른-아침 별'을 분명하게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14장 12절에서 바벨론은 이른-아침이 오기 직전에 사라지는 덧없고 일시적인 존재인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과 악을 제거하시고 영원한 빛과 생명을 주시는 참된 이른-아침의 광명한 별입니다. 따라서 '프로이'를 단순히 '새벽'으로 잘못 번역하면 예수님과 바벨론을 같은 개념으로 혼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번역과 해석은 성경 본문의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절기(모에딤)의 중요성을 희석시키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특히 라틴어 성경 번역을 통해 히브리어 성경의 언어적, 문화적 권위를 축소하려는 역사적 배경에서, 절기 중심의 신앙이 일요일 중심의 신앙관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정보 제공의 요지
이 글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특정 교단이나 종교적 교리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글은 한국의 주요 교단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어떠한 단체와도 무관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곳의 사역은 특정한 사람이나 조직을 위한 것이 아니며, 오직 메시아 예슈아를 높이고 그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역 장소입니다. 본 글의 목적은 오직 성경 원문의 정확한 번역과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새벽'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헬라어로 **오르드로스(ὄρθρος)**입니다.
대표적인 사용 구절은 누가복음 24장 1절입니다.
누가복음 24:1 헬라어 원문
Τῇ δὲ μιᾷ τῶν σαββάτων ὄρθρου βαθέως
(테 데 미아 톤 사바톤 오르드루 바테오스)
정확한 직역
"한 사바톤의 깊은 새벽(ὄρθρος)에"
여기서 'ὄρθρος(오르드로스)'는 정확하게 이른 아침보다 더 이른 시간, 즉 여명이 오기 전의 깊은 새벽을 의미합니다.
'프로이(πρωΐ)'는 반드시 "이른-아침"으로 번역하고, "새벽"이라는 표현은 '오르드로스(ὄρθρος)'에만 적용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새벽'이라 표현할 때 프로이와 오르드로스를 명확히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네(4) 복음서가 기록한 예슈아의 부활 시간은 각각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 간격 안에 일어난 동일한 사건을 각 복음서 기자들이 서로 다른 시점과 강조점에서 묘사한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정확히 분석하여 각 복음서의 시간 개념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은 "옵세 데 사바톤(ὀψὲ δὲ σαββάτων) 에피포스쿠세(ἐπιφωσκούσῃ)"로 표현하며, 이는 삼일간 연속된 샤바톤 절기 중 세 번째 샤바톤(첫 보릿단을 요제로 드리는 절기)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옵세'는 삼일 연속된 샤바톤의 마지막 날 후반부, 즉 아직 샤바톤 절기 중 한 날이 막 밝아오려는 때를 표현합니다.
마가복음 16:2는 "리안 프로이 테 미아 톤 사바톤(λίαν πρωῒ τῇ μιᾷ τῶν σαββάτων) 아나테일란토스 투 헬리우(ἀνατείλαντος τοῦ ἡλίου)"로 표현하며, 매우 이른-아침으로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때를 나타냅니다. 이때 여인들은 무덤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1은 "오르드루 바테오스(ὄρθρου βαθέως)"로 표현하며, 새벽 여명 직전의 매우 이른 시간, 즉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때에 여인들이 이미 무덤에 도착했음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20:1은 "프로이 스코티아스(πρωῒ σκοτίας)"로 표현하며, 이른-아침이지만 아직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때임을 의미합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묘사는 서로 모순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것으로, 매우 짧은 시간 간격 내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오히려 성경의 진실성을 더욱 명확히 보여주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