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1
바리세파 사람들 가운데 니크데모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의 지도자였다.
요 3:2
그가 밤에 예슈아께 와서 말했다.
“랍비,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인 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이 행하는 표징들(헬라어: σημεῖα, sēmeia → 히브리어: אוֹת, ot)을 할 수 없습니다.”
요 3:3
예슈아께서 대답하셨다.
“아멘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헬라어: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basileia tou theou → 히브리어: מַלְכוּת אֱלֹהִים, malkhut Elohim)를 볼 수 없다.”
요 3:4
니크데모스가 말했다.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의 태에 다시 들어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
요 3:5
예슈아께서 대답하셨다.
“아멘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영(헬라어: πνεῦμα, pneuma → 히브리어: רוּחַ, ruach)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헬라어: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basileia tou theou → 히브리어: מַלְכוּת אֱלֹהִים, malkhut Elohim)에 들어갈 수 없다.
요 3: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헬라어: πνεῦμα, pneuma → 히브리어: רוּחַ, ruach)에서 태어난 것은 영(헬라어: πνεῦμα, pneuma → 히브리어: רוּחַ, ruach)이다.
요 3:7
내가 너희에게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을 놀라워하지 마라.
요 3:8
바람(헬라어: πνεῦμα, pneuma → 히브리어: רוּחַ, ruach)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영(헬라어: πνεῦμα, pneuma → 히브리어: רוּחַ, ruach)으로 태어난 자마다 이와 같다.
🔍 요한복음 3:8과 마태복음 7:25의 ‘바람’ 비교 분석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πνεῦμα (pneuma)**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영’으로 번역되지만, 본문에서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성령의 역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구약 히브리어의 **רוּחַ (ruach)**에 해당하며, 이 단어는 ‘영’, ‘바람’, ‘호흡’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예슈아는 성령의 보이지 않지만 실제적인 역사, 즉 영적 출생의 본질을 ‘바람’이라는 감각적 이미지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반면, 마태복음 7장 25절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ἄνεμος (anemos)**입니다. 이 단어는 전적으로 기상현상으로서의 바람, 즉 물리적인 폭풍을 의미합니다. 문맥상 이 바람은 성령의 역사와는 무관하며, 단지 현실적인 자연의 힘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히브리어에서는 이 물리적 바람조차도 רוּחַ (ruach) 혹은 רֶוַח (ruach) 같은 단어로 표현되며,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구별됩니다.
이 두 구절의 차이를 통해 우리는 헬라어 신약성경이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의미를 얼마나 정확하게 구별하고 번역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8은 성령의 비가시적 역사를 묘사하며, 마태복음 7:25는 기후적 파괴력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둘 다 히브리어 ‘루아흐’를 각기 다른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구분하여 헬라어로 옮긴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과 구약 사이에 어떠한 단절이 없으며, 오히려 완벽한 언어적, 신학적 조화가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예슈아께서는 히브리어 성경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하게 말씀하셨고, 신약은 그 말씀을 헬라어로 정밀하게 번역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별을 통해 우리는, 지구상에서 재해를 일으키는 자연의 바람은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사도행전 2장처럼 성령께서 강한 바람 소리와 함께 임하실 때의 현상은 상징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열왕기상 19:11에서도 확인됩니다. 여호와께서 강한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지진이나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으셨으며, 그 후에 세미한 소리 속에서 임재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외적인 현상보다 내면의 성령의 역사로 임하신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위 설명에 빠진것: 지구에 공기가 순화하여 생명을 유지하며,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은 성령의 역사, 즉 루아흐 엘로힘의 메라헤페트의 하나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않됩니다. 한가지의 해석을 가지고 또 다른 성령의 역사를 없는것 처럼 해석하게되면 심각한 요류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양자역학 또한 성령의 신묘막측하신 운행하심, 메라헤페트의 한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 요한복음 3:8과 마태복음 7:25의 ‘바람’ 비교 분석중 위에 빠진 사항을 포함한 설명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πνεῦμα (pneuma)**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영’으로 번역되지만, 본문에서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성령의 역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구약 히브리어의 **רוּחַ (ruach)**에 해당하며, 이 단어는 ‘영’, ‘바람’, ‘호흡’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예슈아께서는 성령의 보이지 않지만 실제적인 역사, 즉 영적 출생의 본질을 ‘바람’이라는 감각적 이미지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반면, 마태복음 7장 25절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ἄνεμος (anemos)**로, 이는 기후적이고 물리적인 바람을 뜻합니다. 이 문맥에서 바람은 성령의 내재적 역사와는 무관한 자연재해적인 요소로 사용되며, 히브리어 구약에서도 이런 경우 루아흐(רוּחַ) 또는 **레바흐(רֶוַח)**로 표현될 수 있지만, 문맥상 하나님의 임재가 아닌, 파괴적 환경 조건으로 해석됩니다.
이처럼 두 구절은 모두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충실히 반영한 신약의 번역이며, 각각의 헬라어 선택은 히브리어 ‘루아흐’의 다양한 문맥적 의미를 정확히 구분하여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약 헬라어 성경이 결코 히브리어의 깊이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예슈아의 히브리어 말씀을 100% 정확히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람 중에서도 지구의 공기를 순환시키고 생명이 호흡하며 유지되도록 하고,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은 바로 성령의 역사, 즉 루아흐 엘로힘의 메라헤페트(מְרַחֶפֶת)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2에서 "하나님의 영(רוּחַ אֱלֹהִים)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다(메라헤페트)" 하신 이 표현은 바로 공기의 움직임, 생명을 지탱하는 흐름, 그리고 질서 속의 혼돈 정리까지도 포함하는 전능하신 성령의 일하심을 가리킵니다.
만일 우리가 ‘바람’을 단지 자연현상으로만 여기고, 그 안에 담긴 루아흐의 생명적 사역을 부정하거나 경시한다면, 이는 성령의 역사를 한쪽 면으로만 보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성령의 바람은 파괴의 바람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을 위한 바람이기도 하며, 이중적이지만 하나된 진리로 작용합니다.
더 나아가, 이 개념은 현대 과학에도 연결됩니다.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에서 말하는 에너지의 파동성, 입자의 불확정성, 시공간을 초월하는 상호작용 등은, 성령의 **운행하심(메라헤페트)**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엿볼 수 있는 영역입니다.
즉, 양자역학 또한 성령의 신묘막측하신 운행하심의 한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과 과학의 조화를 바르게 해석하는 길입니다.
요 3:9
니크데모스가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요 3:10
예슈아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인데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1
아멘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지만,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 3:12
내가 땅의 것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늘의 것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요 3:14
모셰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헬라어: ζωὴ αἰώνιος, zōē aiōnios → 히브리어: חַי עוֹלָם, chai olam)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헬라어: μονογενής, monogenēs → 히브리어: יָחִיד, yachid)를 주셨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헬라어: ζωὴ αἰώνιος, zōē aiōnios → 히브리어: חַי עוֹלָם, chai olam)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헬라어: κρίνῃ, krinē → 히브리어: שָׁפַט, shafat)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헬라어: σωθῇ, sōthē → 히브리어: יָשַׁע, yasha)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헬라어: κρίσις, krisis → 히브리어: מִשְׁפָּט, mishpat)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심판(헬라어: κρίσις, krisis → 히브리어: מִשְׁפָּט, mishpat)을 받은 것이다.
요 3:19
심판(헬라어: κρίσις, krisis → 히브리어: מִשְׁפָּט, mishpat)은 이것이다. 빛(헬라어: φῶς, phōs → 히브리어: אוֹר, or)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헬라어: φῶς, phōs → 히브리어: אוֹר, or)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한(헬라어: πονηρὰ, ponēra → 히브리어: רַע, ra)이었기 때문이다.
요 3:20
악한(헬라어: πονηρὰ, ponēra → 히브리어: רַע, ra) 일을 하는 자는 빛(헬라어: φῶς, phōs → 히브리어: אוֹר, or)을 미워하며, 그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빛(헬라어: φῶς, phōs → 히브리어: אוֹר, or)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요 3:21
그러나 진리(헬라어: ἀλήθεια, alētheia → 히브리어: אֱמֶת, emet)를 따르는 자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빛(헬라어: φῶς, phōs → 히브리어: אוֹר, or)으로 나아온다.
요 3:22
그 뒤에 예슈아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침례를 주셨다.
요 3: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았다.
요 3:24
이는 요한이 아직 감옥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3:25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인 사이에 정결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요 3:26
그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했다. “랍비, 요단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분이 침례를 주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분께로 가고 있습니다.”
요 3:27
요한이 대답했다. “사람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요 3: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고, ‘나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다’라고 말한 것을 너희가 증언할 수 있다.
요 3:29
신부를 가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나는 지금 이 기쁨으로 충만하다.
요 3:30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자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지만, 하늘에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신다.
요 3:32
그는 자기가 본 것을 증언하지만, 아무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 3:33
그의 증언을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인친 것이다.
요 3:34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영(헬라어: πνεῦμα, pneuma → 히브리어: רוּחַ, ruach)을 한정 없이 주셨기 때문이다.
요 3:35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주셨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헬라어: ζωὴ αἰώνιος, zōē aiōnios → 히브리어: חַי עוֹלָם, chai olam)을 가진다. 그러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헬라어: ζωή, zōē → 히브리어: חַי, chai)을 보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헬라어: ὀργή, orgē → 히브리어: חֵמָה, chemah)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