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1 그러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인가?
롬 3:2 많은 점에서 크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들을 맡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3:2의 헬라어 원문에는 **“τὰ λόγια τοῦ θεοῦ (타 로기아 투 데우)”**가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λόγια (로기아)**는 단순히 “말씀들(words)”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라클, 신탁, 계시된 말씀”**을 뜻합니다.
**λόγος (로고스)**의 축소형·파생형 → “말씀, 말”
그러나 단순한 “말씀들”이 아니라, 신적 권위를 가진 말씀이라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그리스어에서 λόγιον (로기온) = 신탁(oracle), 신들의 계시된 말.
따라서 λόγια = 하나님의 신탁들, 계시된 말씀들, 오라클
롬 3:2: “그들이 하나님의 λόγια를 맡았다.” → 할례받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토라, 예언서, 성경)**을 맡았다는 뜻.
행 7:38: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살아 있는 λόγια” → 율법을 가리킴.
히 5:12: “하나님의 초보적인 λόγια” → 성경 말씀, 신적 계시.
벧전 4:11: “하나님의 λόγια를 하는 것 같이 말하라” → 인간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
λόγος (로고스): 일반적 ‘말씀, 말, 진리, 메시지’ (성경말씀 또는 보편적)
λόγια (로기아): 신적 권위를 가진 특정한 말씀, “오라클(oracle), 계시된 말씀, 토라와 선지자들의 말씀”
롬 3:3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겠는가?
롬 3:4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참되시되, 모든 사람은 거짓말하는 자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 이기려 하심이라” 한 것과 같다.
롬 3:5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슨 말하겠는가? 내가 사람의 방식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겠는가?
롬 3:6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시겠는가?
롬 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그의 영광을 위하여 더욱 넘쳤다면, 어찌 내가 여전히 죄인처럼 심판을 받겠는가?
롬 3:8 또 어떤 이들이 우리가 말한다 하여 비방하듯이, “악을 행하여 선이 오게 하자” 하는데, 그들의 정죄(κρίμα, 크리마)는 옳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뛰어나냐? 결코 아니다. 우리가 이미 유대인과 헬라인을 다 죄 아래에 있다고 고발하였다.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롬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으니,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들의 혀로는 속임을 행하며, 그들의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롬 3:14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
롬 3:15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며,
롬 3:16 그들의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 있다.
롬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
롬 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νόμος, 노모스)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로(ὑπὸ νόμον, 휘포 노몬)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 아래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율법으로는 죄에 대한 인식이 있다.
롬 3:21 그러나 이제 율법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해설
“율법과는 별도로(χωρὶς νόμου)”
글자 그대로는 “율법과 분리되어, apart from the law.”
이는 율법을 무효화하거나 버렸다는 뜻이 아님.
의미: 하나님의 의가 **율법의 행위(율법을 지켜서 얻는 것)**를 근거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선언.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으로 얻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드러내신 의.
이 의는 율법의 본래 목적이 가리키던 것이며, 결국 메시아 예슈아 안에서 계시됨.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바울은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토라와 예언서 전체가 예언하고 증언해 온 그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
즉, “토라가 증언하는 복음”이라는 관점.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율법의 행위와는 독립적으로 드러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미 증언해 온 동일한 의이다. 따라서 바울의 주장은 율법을 폐지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본래 가리키던 목적과 성취가 드러났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성취는 바로 토라가 성육신하신 메시아 예슈아이며, 예슈아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성경은 그분을 증언하고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롬 3:22 곧 하나님의 의는 메시아 예슈아의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임하나니, 차별이 없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롬 3:24 메시아 예슈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롬 3:25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전에 지은 죄들을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해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메시아 예슈아를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ἱλαστήριον)”**로 선포한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토라의 제사 제도 전체가 예표하고 있던 실체를 가리킨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 모든 제사가 결국 메시아 예슈아의 십자가 사역을 가리키는 모형이었다.
그분의 피 흘리심은 성막의 제물의 피가 속죄소 위에 뿌려졌던 것처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드러내는 사건이다.
따라서 제사 제도의 목적은 본래 예슈아 안에서 성취될 구속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으며, 십자가에서 완전한 실체로 드러났다.
바울은 이를 통해, 율법 자체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 증언한 참된 속죄의 길이 예슈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증거한다
롬 3:26 곧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메시아 예슈아의 믿음을 가진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다.
롬 3:27 그러면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배제되었다.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다. 믿음의 법으로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한다.
롬 3: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도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롬 3:30 한 분 하나님께서 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것이다.
롬 3:26–30 해설 — ‘믿음’(אמונה, 에무나)이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의의 드러남
바울은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메시아 예슈아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을 선포한다. 여기서 믿음은 단순한 감정적 동의가 아니라 **언약적 신실함(에무나)**이다.
2) 에무나(אמונה) — 히브리어 성경의 믿음
어원 아만(אמן) = “확고하다/신실하다.”
파생: 아멘, 에메트(진실).
→ 믿음 = 확고히 붙드는 신실한 순종,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
3) 아브라함의 신앙
아브라함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떠나고, 순종하고, 드리고, 기다림으로써 굳건한 신실함을 보였다. 이것이 믿음의 본보기다.
4) 율법의 행위에 의존 = 하나님과 힘겨루기
율법의 행위를 자랑의 근거로 삼는 것은 “내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의롭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는 태도이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에 최고의 힘을 두는 불신이며, 결국 자랑을 낳는다.
5) 사업 파트너 비유
마치 두 사람이 사업 파트너십을 맺었는데, 계약서에 기록된 것만 지키면 된다고 하고, 개인적·가족적 유대관계는 배제하는 경우와 같다.
그 관계는 사랑이나 신뢰가 아니라 물질이 주인이 된 억지 관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토라의 글자적 행위를 “조건”으로만 붙잡고, 신실한 믿음의 관계를 배제한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6) 결론 — 한 분 하나님, 하나의 길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한 분 하나님이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믿음(에무나/피스티스)**으로 의롭다 하신다.
→ 믿음 = 토라적 신실함 속에서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
→ 율법을 굳게 세우는 믿음(롬 3:31).
롬 3: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무효로 하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
해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믿음이 율법을 새로 세우거나 보완한다는 뜻이 아니다. 토라는 처음부터 완전했으며, 메시아 예슈아께서 그 토라를 온전히 이루셨다.
따라서 믿음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지하는 길이 아니라, 예슈아 안에서 토라가 완전하게 성취되었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길이다. 믿음을 통해 성도는 토라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토라의 참뜻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서 기독교 전통은 이 말씀을 한 절씩 잘라 따로 해석하며, 바울을 토라를 무너뜨린 자로 왜곡해 왔다. 바울은 토라를 목숨처럼 사랑한 유대인으로서, 메시아 예슈아 안에서 토라의 참된 의미가 실현됨을 증언한 것인데, 그 본래 의도가 천여 년 동안 오용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바울의 유대적 정체성과 토라 사랑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가 경고한 대로,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로마서도 억지로 해석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된다(벧후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