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5:14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에클레시아(세상과 구별된 진정한 교회)의 장로들을 부를 것이며,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5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 것이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다.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는 용서를 받을 것이다.
야고보서 5:16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에게 너희의 잘못들을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너희는 치유를 받을 것이다. 의롭게 된 자들의 기도는 큰 능력으로 역사한다.
치유의 시작은 병든 자의 선택이다
병든 자는 먼저 스스로 에클레시아의 장로들을 불러야 한다. 이는 자기 의지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장로의 사명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 바르고 기도하는 것'이다
단순한 중보기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름 부음이라는 상징적 행위와 함께 주의 권위를 의지한 치유 사역이 요구된다.
믿음의 기도는 영혼의 회복까지 포함한다
'구원하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혼(네페쉬)의 회복과 삶 전체의 회복까지 포함한다. 이는 예슈아께서 행하신 '온전한 치유'와 같다.
회개는 치유의 필수 조건이다
야고보는 "서로에게 고백하라"고 명령형으로 기록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비밀 고백이 아니라, 에클레시아 안에서의 공동체적 회개를 말한다.
치유의 자리에 선 모두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병고침을 구하는 자, 중보 기도하는 자, 장로,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모두가 진실하고 공개적인 회개로 나아가야 한다.
회개 없는 치유 사역은 성경이 말하는 방식이 아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의인된 자의 기도는 실제로 역사한다
진실한 회개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드리는 기도는 헛되지 않다. 그것은 실제로 강력하게 역사한다.
이사야 11:2에서 예언된 "여호와의 영"은 메시아 예슈아 위에 머무는 일곱 영(루아흐)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단지 신비적 체험이 아닌, 전 인격의 중심인 두뇌의 지적 영역에 실질적으로 작용하여, 신앙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지휘 체계입니다.
이사야 11:2에 나타난 일곱 영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영 (루아흐 여호와)
지혜의 영 (루아흐 호크마)
총명의 영 (루아흐 비나)
모략의 영 (루아흐 에차)
능력의 영 (루아흐 게부라)
지식의 영 (루아흐 다아트)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루아흐 이라트 여호와)
이 중에서도 ‘지혜’, ‘총명’, ‘모략’, ‘지식’은 모두 인간의 두뇌, 곧 지적 기능 영역에서 작동하는 성령님의 실제적인 사역입니다. 즉,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이해하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이 중심 역할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잠언2:5 여호와 경외하기(이라트)를 깨달으며(빈, 식별하다, 분별하다) 하나님을 알게(다아트, 지식) 되리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 까지도 인간의 두뇌의 지적 기능으로 작동하게 하신다는 뜻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감정과 체험 중심으로 이해하지만, 성경은 ‘지식(다아트)’과 ‘이해(비나)’와 ‘지혜(호크마)’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분별하며, 적용하는 힘이 성령을 통해 두뇌 속에서 역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언제나 "기록되었으되"라는 표현으로 성경을 해석하셨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기록된 말씀에 기초하여, 정확하게 구약을 인용하고 그 의미를 바르게 전달하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검입니다.
에베소서 6:17에서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도구(히브리서 4:12)입니다. 그런데 이 검이 올바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지적으로 바르게 각인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번역, 철학과 융합된 신학, 혼합된 사상 위에 성령의 검은 결코 날카롭게 작동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은 히브리어 구약 성경과 코이네 헬라어 신약 성경의 언어적 사용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 번역을 중심으로 철학이나 다른 종교 사상, 인간 중심의 해석을 섞어 만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 중 지식(다아트)과 지혜(호크마)를 무시하고, 인간적 열심으로 포장된 ‘다른 복음’을 만들어내는 길입니다.
말씀은 영입니다. 이 말씀을 온전히 지적 영역에 새기고, 지혜와 분별력으로 해석하고, 전 인격으로 순종하여 행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신앙이 살아납니다. 그 중심에 바로 하나님의 일곱 영이 계십니다.
결론: 하나님의 일곱 영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 두뇌의 지적 중심에 임하여 정확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삶 속에서 적용하도록 이끄시는 실제적인 사역입니다. 성령의 검이 날카롭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정결하고 온전하게 우리의 지성 속에 각인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살아 있는 믿음이며,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는 지식이 지혜의 근본이라.” (잠언 1:7)
❖ 이사야 11장과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특히 이사야 11장은 성령님의 일곱 가지 영에 대한 매우 중요한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용어들은 단순히 한국어 한 단어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번역본에 나온 특정 단어를 기준으로 성령님의 사역을 정의하거나 해석하려 한다면, 이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단편적인 이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어 원어에서 사용된 각 용어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전체적으로 조사하고 깊이 묵상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우리 안의 ‘지성소’에 해당하는 두뇌에 각인시키는 과정이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법궤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령사역자들과 집회는 이 말씀의 법궤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정확한 말씀이 아니라, 번역에 의존한 틀린 해석과 함께 진행됩니다. 설교자나 인도자는 원어성경의 올바른 지식없이, 자기가 배운것과 스스로 생각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에 의존하며 운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십계명을 선포하신 직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였던 반응과 같은 영적 상태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출 20:18–19, 신 5:23–27)
이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기를 거부한 상태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성령집회, 영성수련회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원어 성경의 올바른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께 직접 듣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과 교통하기보다는, 누군가 대신 전해주는 말과 체험에 의존합니다.
어떤 이는 하루 20시간을 돈 버는 데 쓰고 4시간만 자면서도, 성경을 묵상하는 데에는 30분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번 돈으로 자신이 추종하는 설교자에게 헌금하고, 그가 주관하는 수련회에 4박 5일씩 참여하며,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비즈니스가 성공할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고, 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마 7:22–23)
예수님의 이름은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 자체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빌려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뜻과 분리된 능력 사용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참된 치유사역과 치유집회는 회개와 말씀 중심의 믿음 안에서만 시작됩니다.
물론 원어 성경을 올바로 알 수 없던 시대에 살았거나, 성경을 일부 잘못 이해했더라도, 실제 삶 속에서 헌신과 봉사로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분들도 많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누군가가 "한양에 갈 때는 말을 타고 산을 넘어야지 왜 차를 타고 가느냐"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AI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 해석을 AI에게 맡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AI조차도 하나의 도구로 삼아, 우리가 성경 말씀을 더욱 철저하고 정확하게 따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28 – 예슈아직역과 영적 진단
로마서 1:28 (예슈아직역)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두뇌의 지적인 기능(누스, nous) 안에 두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지성 상태(아도키모스 누스, adokimos nous)에 넘기셨다.
그 결과, 그들은 합당하지 않은 일들을 행하게 되었다.
핵심 용어 요약
누스(nous): 두뇌의 지적인 인식 기능.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진리를 판단하는 중심 기능.
아도키모스 누스(adokimos nous): 테스트에 탈락된 지성, 하나님 보시기에 기능을 잃은 비정상적 판단력.
핵심 해석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의 중심’에 두지 않는 사람들,
즉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지적으로도 진리를 분별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두뇌의 기능 자체를 버려두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냉담이나 불신앙이 아니라, 지적인 기능이 무너진 상태에 이르는 영적 심판이다.
오늘날의 적용
현대 신앙에서 누스는 종종 무시된다.
설교자를 통하여 말씀을 깨달아 알게된다?? 눅24:45 바로가기
사람들은 “방언을 하면 깨달음이 온다”, “기도하면 알게 된다”는 식으로,
마치 공중에 둥둥 떠다니던 계시가 기도를 통해 머리에 ‘쑥’ 들어오는 것처럼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식의 반지성적이고 비이성적인 해석은 ‘미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과 함께 지성(nous)**을 주셨고,
그 지성은 말씀으로 훈련되고 각인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외부 자극처럼 떠다니다가 흡수되는 정보가 아니다.
묵상하고, 분석하고, 이해하고, 적용하는 훈련된 누스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다.
결론
누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체험을 하고, 열정을 불태워도
결국 판단은 비뚤어지고, 합당하지 않은 행위로 흘러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28이 말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지성의 상태”다.
일부이지만, 적지않은 숫자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원어성경 그대로 똑바로 아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율법주의자, 문자주의라고 비판하며 자기들이 속한 단체와 지도자의 해석을 따른다.
지금은, 지성을 버릴 때가 아니라,
오히려 누스가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서 '지성소에 언약궤"를 찾아서 회복 할 때이다.
스바냐 3:9 – 사파 브루라(שָׂפָה בְרוּרָה, 정결한 언어), 에벳 에하드(עֹבְדִים שְׁכֶם אֶחָד, 한 어깨로 섬기는 하나의 마음)
스바냐 3:9에서 주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민족 가운데서 언어를 정결하게 회복시키시고(사파 브루라),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뜻으로(에벳 에하드) 자신을 섬기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단순히 언어적 회복이 아닌, 성경 해석의 하나 됨과 말씀에 대한 올바른 복종의 회복을 포함하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왜 이 예언이 이루어져야 합니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신앙하고, 서로 다른 해석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정결하지 않은 말과 혼란스러운 말씀 이해로 인해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혼란이 아닌 하나 됨을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미리 알려주신 그 방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시대는 더 이상 사람의 소리를 따라가며 신앙할 때가 아니라, 정결한 언어와 하나 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각자의 지성소, 곧 두뇌 깊은 곳에 새겨진 상태에서 이미 멀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의 토라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대신 감정, 성공에 대한 욕망, 그리고 종교적 열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언약궤가 없는 텅 빈 지성소, 이것이 오늘날 교회와 성령사역 현장의 실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깊이 묵상하며 자기 두뇌에 각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구약과 헬라어 신약의 원뜻을 알고자 하는 정직하고 신중한 갈망보다는, 설교자가 전하는 말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 결과, 말씀은 각 사람의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언약궤가 없는 상태에서 속죄소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그분의 말씀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잘못 이해되거나 왜곡된 말씀은 지성소의 언약궤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바르게 깨달아진 말씀만이 진리로 인정되며, 그 진리만이 지성소에 기록되어 언약궤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통하여 성령님과 말씀으로 직접 만나지 못하고, 남의 설교에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외부 자극에만 반응하는 신앙 구조는 고착되고, 그 안에서는 성령의 직접적 조명이 아닌 사람의 음성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구조는 초신자를 향한 복음 전도에는 쓰일 수 있으나, 그 이후 각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직접 깨어나는 영적 ‘핵분열’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사역’, ‘우리 단체’, ‘우리 교단’이라는 틀 속에 갇혀 병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당을 짓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스바냐 3장 9절에서 주님은 “열방의 언어를 정결하게 하여, 다 한 입술로 나를 섬기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전 세계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한 마음, 한 뜻, 하나 된 해석 위에서 주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뜻입니다.
설교자들은 “나는 나를 따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역할 뿐이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번역 성경을 원어 성경처럼 여긴 잘못된 학습 위에서, 성경을 올바로 정확히 알아야 하는 두뇌의 지적 영역과 기능 속에 정확한 의미가 각인되지 않은 채 말씀을 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의 원래 구조와 문맥은 무시되고, 왜곡된 해석이 반복되며 그대로 ‘진리’처럼 전수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자신도 모르게 틀린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은 올바른 분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결국 교회 전체는 차가운 지성과 올바른 말씀 없이, 인간적이고 잘못된 성경 이해와 해석으로 빗어진 열심 위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잘못 배우고 알았더라도, 진실한 믿음의 중심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시며, 잘못 이해하고 설명한 것보다는 참되고 진실된 마음과 사랑의 실천을 먼저 보십니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된다면 성경 해석과 번역의 왜곡은 고착화되고, 말씀의 본래 의도를 회복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설교자가 전하는 성경 내용은 때로는 맞을 수도 있지만, 자주 왜곡되거나 일부만 전달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성도 개인이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훈련 없는 말씀 사용, 묵상 없는 해석, 깊이 없는 적용은 결국 영적 성장이 멈추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따르게 됩니다. 설교자에게 헌금하고, 그가 주관하는 수련회에 참여하며,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하나님의 능력을 비즈니스 성공에 연결시키는 법을 배우는 데 집중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열심과 체험이 하나님의 정확하고 거룩하신 살아 있는 말씀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건의 모양만 있고 실제 내용은 비어 있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점점 더 정확하고 올바르게 말씀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잃어버리는 모습도 보입니다. “말씀이 좀 틀려도 괜찮다”, “성령의 역사가 더 중요하다”, “말씀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사랑의 실천이다”라는 말은 포용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때로는 말씀에 대한 본질적 경외심과 경청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경계하며(단 7:25, 사 14:13), 히브리어 성경에 담긴 정확한 뜻을 알고자 하는 겸손한 갈망과, 깊이 있는 묵상과 성령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온전하고 거룩하신 말씀이 각자의 지성소에 새겨져 있지 않다면, 그 사람 안에는 언약궤는 비어 있습니다. 두뇌, 곧 지적 영역을 말씀 없이 비워둔 채 치유가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확하고 거룩하신 살아 있는 말씀으로 회복되지 않는 사역, 날카롭고 분별력 있는 성령의 검이 작동하지 않는 부흥은 결국 인간의 열심만으로 유지되는 종교적 반복으로 남게 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언약궤를 두뇌로 비유하는 표현 자체에 이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적 의미든 상징적 이해든, 결국 그 중심은 동일합니다. 두뇌의 지적 영역, 곧 우리의 지성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정확하고 거룩하신 말씀이 새겨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결국 말씀 없는 언약궤일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 없는 언약궤에는 속죄소가 머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언약궤 속에 참된 말씀이 없다면, 그 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긍휼과 진리도 머물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정의 열심이 아닌, 말씀의 분별력으로. 번역된 해석이 아닌, 원래 주어진 정결한 언어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두뇌의 지적 영역 안에 다시 말씀을 새겨 주시기를 구합시다. 그 말씀이 다시 언약궤가 되고, 그 위에 주의 임재가 머무르며, 속죄소에서 흘러나오는 긍휼과 진리가 우리의 신앙과 삶 전체를 새롭게 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여, 내 지성소가 다시 말씀으로 깨어나게 하소서. 정확하고 온전하신 거룩한 말씀 없이 떠들었던 모든 종교적 행위를 회개합니다. 이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정결한 언어로, 하나 된 해석으로, 철저한 순종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