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바울은,
사실 그대로의 증거:
사도행전 9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4 그는 땅에 엎드려졌고, 한 음성이 들려 말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5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거기서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네게 말해줄 것이다."
15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가 택한 그릇이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16 내가 그에게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보여줄 것이다."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님,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다. 너로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그러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고,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일어나 침례를 받았고,
19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이후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20 그는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과 진리로 확신된 믿음의 고백:
고린도전서 15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빌립보서 3:7-8
7 그러나 내가 이전에 유익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깁니다.
8 더 나아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이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하여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쓰레기처럼 여깁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입니다.
1:2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전통적으로 누가가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는 바울과 동행하며 선교 사역에 함께한 인물로, 사도행전의 일부는 1인칭 복수형(“우리”)으로 기록되어 바울과 직접 동행했던 사실을 암시합니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사도 바울이 직접 기록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갈라디아서의 기록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스스로 편지를 썼음을 언급합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6:1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큰 글자로 너희에게 손수 쓴 것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편지의 일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관례에 따라, 대부분의 서신은 대필자(서기관)를 통해 작성되었고, 마지막 인사나 중요한 부분은 저자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쓰곤 했습니다.
대필자가 있는지 여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대필자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편지의 대부분을 바울 자신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로마서(16:22)처럼 다른 서신에서는 대필자의 이름(예: 더디오)이 명시된 경우도 있어, 갈라디아서에도 대필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공동 지필자의 의미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편지를 쓸 때 그와 함께 있던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형제들은 서신의 내용을 공동으로 승인하거나, 편지의 권위를 지지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글을 직접 기록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당시 바울과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
갈라디아서의 작성 시기와 바울의 여정을 고려할 때, 그와 함께 있었던 형제들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나바: 바울과 1차 선교 여행에서 동행한 주요 인물로, 갈라디아서 2장에서 직접 언급됩니다.
디도: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이 특별히 언급하며, 그와 함께 선교 사역에 동참했던 인물입니다.
그 외 바울과 선교 활동을 함께했던 초기 동역자들.
1:3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으니,
1:5 영광이 그에게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아멘.
십자가 복음의 사도:
무엇보다도, 강력한 빛과 말씀으로 바울을 직접 찾아오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바울의 사도됨의 중심입니다. 바울이 누구에게 복음을 배웠다거나,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기 위해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성경을 읽을 때 수건이 덮여 있었지만, 예수께로 돌아오면 그 수건이 벗겨져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져서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집니다.
15 오늘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16 그러나 누구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은 벗겨집니다.
1:6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깁니다.
1:7 사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할 뿐입니다.
1:8 그러나 우리나,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1:9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이제 다시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주석:
거짓 그리스도들(프세우도크리스토스, ψευδόχριστος), 거짓 선지자들(프세우도프로페타이, ψευδοπροφῆται), 그리고 거짓 교사들(프세우도디다스칼로이, ψευδοδιδάσκαλοι)는 오늘날도 여전히 곳곳에서 활동하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들에게 "거짓"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하는 방식으로 진리와 거짓을 적절히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진리 속에 거짓을 교묘히 섞기 때문에 이것을 심각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것은 다른 종교에 속하지만, 복음의 흉내를 내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에게는 "거짓"이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2025년 1월, 오늘의 현실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정치적 선동을 믿음과 뒤섞은 극우 기독교 세력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16 (예슈아직역)
"또한 모든 편지에서, 바울이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들 속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데, 배우지 못한 자들과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이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억지로 풀어 스스로 멸망에 이릅니다."
1:10 지금 내가 사람들의 호의를 구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호의를 구합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자 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1:11 형제들이여,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님을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주석;
사도 바울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서신들은 항상 히브리 성경을 인용하며,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전하려는 노력으로 가득합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의 신성을 깊이 신뢰하며, 충실하고 성실하며 잘 훈련된 믿음(히브리어: 아만, 아멘)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은 히브리 성서의 핵심 주제이며, 성경에 사용된 주요 히브리어 단어들을 깊이 탐구해보면 예슈아와 연관된 완벽한 복음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12장, 53장, 하박국 3장은 예슈아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장들입니다.
바울서신의 관련성구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씀에 아무것도 더하지 말고, 아무것도 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하라.
고린도전서 4:6
형제들이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 본을 보였으니, 이는 기록된 것을 넘어서지 말라는 교훈을 너희가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를 대적하며 교만해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24:14 (예슈아 번역)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고 부르는 길을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습니다."
로마서 7:12 (예슈아 번역)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합니다."
에베소서 6:17 (예슈아 번역)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요한계시록 22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이 말씀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또한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의 몫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
잠언 30:6
그의 말씀에 아무것도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실 것이며, 너는 거짓말하는 자로 드러날 것이다.
1:13 여러분이 들었듯이, 내가 이전에 유대교(쥬다이즘)에 있었을 때 하나님의 교회를 극심히 박해하고 파괴하려 했습니다.
1:14 나는 내 동족 중 많은 동년배들보다 유대교(쥬다이즘)를 더욱 철저히 따랐으며,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해 더욱 열심을 냈습니다.
쥬다이즘:
1. "쥬다이즘"(Ἰουδαϊσμός)의 사용
"Ἰουδαϊσμός"(쥬다이즘)는 신약성경에서 단 두 번 등장하며, 모두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갈 1:13, 1:14).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유대교라는 종교 체계에 속했던 과거를 고백하며, 그 체계가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넘어선 인간적인 종교 체계임을 지적합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1:14에서, 그는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에서 자신의 열심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는 상관없는 종교적 행위였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 "기독교"(크리스티아니즘)이라는 단어의 부재
신약성경에는 "기독교"(Χριστιανισμός, 크리스티아니즘)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는 "Χριστιανός"(크리스티아노스,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11:26, 사도행전 26:28, 베드로전서 4:16에만 등장하며, 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Χριστιανισμός"이라는 체계적인 종교 용어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3. 의미와 함의
바울이 "Ἰουδαϊσμός"(쥬다이즘)을 사용하며 자신의 과거를 "종교 체계 속의 종교인"으로 묘사한 것은, 참된 신앙과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적 체계를 구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바울은 "쥬다이즘"(Ἰουδαϊσμός)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종교적 열심과 율법주의로 묘사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Χριστιανισμός)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참된 신앙은 특정 종교 체계나 이름에 국한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도 과거 타락한 기독교의 문제점들을 답습하는 어리석은 자세를 버리고, 신실하고 순결한 신앙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예언이 이루어지는 성취에 동참해야 합니다.
스바냐 3:9 (예슈아직역):
"그때 내가 백성들에게 순결한 언어를 주어, 그들이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되어 그를 섬기게 하겠다."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택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1:16 그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내 안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나는 곧 혈육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국한문으로 된 어려운 성경 번역을 전하기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린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세상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올바르고 정확히 아는 것은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은 옛 전통이나 방식, 해석을 고집하며 진취적인 전진을 거부하는 것은, 마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가기 전에 주춤거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현대의 신앙인들도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주저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3:13-16
13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강 물에 닿으면, 요단강 물 곧 위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하나의 둑처럼 서게 될 것이다."
14 백성들이 장막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려고 나아갔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 앞에서 나아갔다.
15 (요단강 물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가득 차서 강둑에 넘치곤 했다.) 그러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물가에 닿자,
16 위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멈추고, 멀리 아담 성읍 곁 사르단에 둑처럼 서며 아래로 흐르는 물은 사해로 완전히 끊어졌다. 백성들은 여리고 맞은편으로 건넜다.
1:17 또한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자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습니다.
1: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열다섯 날을 지냈습니다.
1:19 그러나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1: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아님을 맹세합니다.
사도들과의 만남
갈라디아서 1:18-19: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열다섯 날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게바(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으며, 그 기간은 열다섯 날이었다고 언급합니다.
차이를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
초기 만남과 짧은 체류
행 9:26-28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바나바의 도움을 받아 사도들과 연결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기록합니다.
갈 1:18-19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머문 시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주로 베드로와의 교제 및 체류 기간(15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관점의 차이
사도행전은 사건의 역사적 기록에 초점을 맞추며,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연결된 과정을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사도직의 기원과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의 체류가 짧았고 사도들과의 교류가 제한적이었음을 언급합니다.
일치점
두 기록 모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접촉했다는 점은 일치합니다.
사도행전은 바나바가 중재자로 등장하며, 바울이 제자들과 사귀고 함께 활동한 내용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체류 기간과 만남의 제한성을 언급하여 바울의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님을 부각합니다.
결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은 두 기록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바울의 초기 활동과 관계 형성에 초점을 맞춘 반면,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사도직 독립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국, 두 기록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상황의 다른 측면을 보완적으로 보여줍니다.
1:21 그 후 나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1. 배경: 다메섹에서의 회심 후 초기 활동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아라비아로 가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갈라디아서 1:17).
이후 다메섹에서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합니다. 이때 바울은 사도들과 짧게 접촉한 후 예루살렘을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이동했습니다(갈라디아서 1:18-21, 사도행전 9:26-30).
2.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의 활동
수리아와 길리기아는 오늘날 터키 남부와 시리아 북부 지역을 포함하며, 바울의 고향인 **다소(길리기아의 중심지)**가 여기에 속합니다.
바울은 이 지역에서 약 10년간 활동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는 종종 "침묵의 시간"으로 불립니다.
사도행전 9:30: "형제들이 이를 알고 바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다소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행 15:23, 갈 1:22).
3. 수리아 안디옥에서의 연결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11:25-26에서 바나바가 바울을 다소에서 데려와 함께 안디옥에서 사역을 시작한 기록이 있습니다.
안디옥은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이 시작된 장소로, 초기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였습니다.
4. 신학적 중요성
바울의 수리아와 길리기아 여행은 이방인 사역의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시기로 이해됩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이후 예루살렘 공의회(사도행전 15장)에서도 그의 사역이 인정받았습니다.
결론
갈라디아서 1:21에서 언급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는 간단한 표현이지만, 이 시기는 바울의 복음 전도와 초기 사역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이곳에서 이방인을 대상으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시작하며, 이후 그의 선교 활동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22 그리고 유대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나를 얼굴로 알지 못했습니다.
1:23 다만 그들은 이렇게 들었을 뿐입니다.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 그가 멸하려 했던 믿음을 전한다.”
1:24 그러자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1. 회심 후 그의 정체성이 변화됨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까지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교 내에서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활동하며, 열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인물이었습니다(사도행전 8:3, 9:1-2).
회심 이후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과거의 정체성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유대 지역의 그리스도 교회들은 그의 회심 이후의 삶에 대한 정보는 들었지만, 그를 직접적으로 알 기회는 없었던 것입니다.
2. 유대 교회와 물리적 거리
바울은 회심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고, 이후 다메섹으로 돌아왔으며(갈라디아서 1:17), 예루살렘에서도 사도들과 짧게 교제한 후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이동했습니다(갈라디아서 1:18-21).
이러한 이동 경로로 인해 유대 지역 교회들과의 직접적 접촉이 제한적이었고, 그의 사역은 주로 이방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3. 박해자로서의 과거와 신앙 공동체와의 단절
바울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인물로 악명이 높았으며, 그의 회심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움과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도행전 9:26-27 (예슈아직역):
"사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제자들과 합류하려 했으나, 그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바나바가 그를 사도들에게 데려가,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본 것과 그가 그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것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이처럼, 바울은 한동안 교회 공동체와 물리적, 신앙적 단절을 겪었고, 유대 지역 교회들로부터 낯선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4. 가말리엘 문하
바울은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율법에 정통한 유대교 학자였지만, 그의 박해자로서의 활동과 회심 이후의 복음 전파 활동은 기존의 유대교적 정체성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생 시절에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회심 이후에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인해 이전의 명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결론
바울이 유대 지역의 그리스도 교회들에게 "얼굴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박해자로서의 과거와 회심 이후 사역지의 물리적 거리로 인해 발생한 결과입니다. 그는 이방인 선교에 주력했기 때문에 유대 지역의 교회들과 직접적인 교류가 적었고, 따라서 그들의 공동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